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p. 151 강진에서는 고달픈 몸 하나 누일 방도 구할 수가 없었다. 정약용은 <상례사전서>에서 "한 노파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해주었다."라고 쓴 대로 한 노파의 동정으로 몸을 누일 수 있었다...
- 동문주막, 사의재
'4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이라고 한다. 정약용이 처음 강진으로 내려갔을 때, (유배 온 학자에 대한 당연한 처사이겠지만) 사람들이 매우 냉담했다고 한다. 머무를 곳 하나 구할 수 없었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심정이 어떠하였을 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당시에는 주막이었다고 하니, 주변이 시장통으로 북적거렸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현재의 사의재는 정말 '맑은 생각'이 가능할 것 같이 고요하고 한적했다. 강진이라는 도시 자체가 그랬다. 사람도 많지 않고 비옥한 토지에 바다를 끼고 있어 한적하니 살기 좋아 보였다. 정약용은 이 곳에서 방대한 양의 책을 집필을 했고, 김영랑은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 두 인물과 참 어울
p. 270 정약용은 다산으로 이주했다. 다산은 강진현 남쪽의 만덕사 서쪽에 있는 처사 윤단의 산정이었다. 여기 와서 정약용은 마음은 안정되어 갔다.... 뒷길에 백련사가 있었다. 백련사에서 정약용은 혜장이란 승려를 만나다...
- 만덕산 다산초당과 백련사
만덕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은 멋졌다! 먼 바다를 내려다 보며 정약용은 자신과 같이 유배된 형을 그리워 했다고 한다. 정말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게 하는 풍경이었다. 백련사는 화려하진 않지만, 고즈넉한 절로 가만히 앉아서 대웅전을 바라보기에 좋은 절이었다.
백련사에서 산길을 걷고 또 걸어서 들어간 다산초당은 정말 인재가 지낸 곳 다운 명당이었다. 대단히 운치가 있고 살기 좋아 보였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