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저우(zhangzhou)
그들만의 작은궁전
푸젠토루를 엿보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나약한 백성들은 혼란스럽다.
전국 각지에서 난이 일기도 하고,
숨죽이고 있던 북방 민족(거란, 여진, 몽골 등)이 침략해 내려 오기도 한다.
혼란기 때마다 중국 대륙에서는 북에서 남쪽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유민이 발생하였다.
중국 역사상 총 5차례가 있었던 대규모 유민은 ‘객가인’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민족을 만들었다.
객가인들은 사실상 중원에 살던 한족(汉族)이지만 거주지를 남쪽으로 옮겨 살아간 사람들을 일컫는다.
객가인의 규모는 7,000만명 정도로, 장시성, 푸젠성, 광동성 일대에 많이 정착했고, 대만과 해외로 진출한 화교들도 상당수 객가 출신이다.
p. 118 1차는 한나라가 멸망한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였고,
2차는 당나라가 기울면서 안사의 난, 황소의 난에 이어진 오대십국의 혼란기였다.
3차는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이 차례로 남하하여 송나라를 멸망시킨 시기,
4차는 명말 혼란기, 5차는 청말 태평천국의 난이 대륙을 휩쓸던 시기다.
- 윤태옥著, <당신은 어쩌자고 내 속옷까지 들어오셨는가> 中
침략과 약탈에 넌더리가 났던 객가인들이 세운 페쇄적인 건축양식인 토루(土樓).
2008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푸젠토루를 살펴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현재 남아 있는 토루는 약 3,000여개로 그 중 총 46채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토루는 주로 푸젠성의 장저우시(漳州市, 장주시), 룽옌시(龙岩市, 용암시) 등지에 분포해 있는데,
나는 유네스코로 지정된 토루가 가장 많이 있다는(20채) 장저우시 난징현(南靖)을 가보기로 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기록을 읽어보니, 이 토루라는 건물은 사실 객가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역사적 고증을 거쳐보니, 원래부터 동남부 지역에 살던 민난인들 역시 이러한 형태의 건축물을 지었던 경우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토루들의 많은 부분이 객가인들이 살았던 건축물이기 때문에, 객가인과 토루문화를 결부시켜 논하는 경우가 많다.
전라갱 토루 (田螺坑土樓)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전라갱 토루, ‘4채 1탕’이라는 귀여운 이름이 붙어 있는 이 토루는 원형토루 4채와 방형토루 1채가 붙어 있어, 4개의 반찬과 1개의 탕과 같다.
산 위에 이 5개의 토루를 함께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비가 내려서 아쉬웠지만, ‘귀퉁이에 있는 작은 건물은 수저’라는 가이드의 추가 설명이 더해져 더욱 흥미로운 토루여행의 막을 열었다.
600여년전에 황씨 일가가 이 일대에서 살면서 우렁이를 먹인 오리를 키웠다고 해서 밭 전(田) 자에 우렁이 라(螺)를 써서 전라갱이라 이름 붙었다.
아래로 내려가서 올려다보면 시짱자치구의 달라이라마 궁전인 ‘포탈라궁을 닮았다’는 가이드의 설명. 포탈라궁을 가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아래에서 올려다 본 모습도 아름답다.
유창루 (裕昌楼)
다음으로 난징현에서 가장 오래된 토루인 유창루로 향한다. 무려 705년이나 된 유창루는 1308년부터 1338까지 30년 동안 지은 집이다.
1층과 2층은 사부가 짓고, 3층부터는 제자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 제자는 사부에게 자신의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기둥을 비스듬히 세워서 완성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돌아와서 정보를 찾아보니, 1972년 지진의 영향으로 기울어져 '동도서왜루(東倒西歪樓)'란 별칭을 얻었다는 기사도 있다. (역시 가이드의 말은 믿거나 말거나 인가?)
유창루는 269개 방이 있는 데 현재는 59개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토루는 보통 두 개 기둥 사이 한 줄(4층)을 한 가족이 쓰게 되어 있다.
p.120 1층은 주방, 2층은 식량 창고, 3층은 침실, 4층은 침실 겸 창고다. 가운데 큰 마당에는 조당을 지어 조상을 모시는데, 소농경제 사회의 종법제도에 따른 것이다.
- 윤태옥著, <당신은 어쩌자고 내 속옷까지 들어오셨는가> 中
요즘에는 1층 앞에 상점을 열어 지역 특산물과 토산품을 팔고 있다.
유창루는 sbs드라마 <카인과 아벨>의 촬영지로도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에서 의사로 나오는 소지섭이 의료봉사활동을 한 장소로 유창루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방문해보면 중국할머니들이 많고, 소간지는 찾을 수 없다. ^^ (기대는 마시길...)
탑하촌 (塔下村)
다음으로 방문한 토루는 탑하촌이라는 마을의 토루군으로 마을 중간을 가로질러 물이 S자로 흐르고, 강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원형 토루가 하나씩 있어 태극모양을 이룬다고 하는데, 위에서 내려다 볼 기회가 없어 실제로 그 모양을 볼 순 없었다.
탑하촌은 진사 14명이 나온 인재촌이자, 평균연령이 85세 이상인 장수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안에 있는 ‘덕원당 장씨종사’라는 곳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타샤촌에 살았던 장씨 가문의 사당으로, 역대 조상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족보가 보관되어 있다.
주소: Taxiacun, Nanjing, Zhangzhou, Fujian, China
덕원당 앞에는 돌로 만든 깃대(석용기[石龙旗] 혹은 스치간[石旗杆]이라고 한다)가 있는데, 장씨 가문에서 큰 공을 세운 훌륭한 조상을 기리는 것이라고 한다. 끝이 붓 모양인 것은 문과에서 활약한 조상의 용기이고, 용 모양인 것은 무과에서 활약한 조상의 용기이다.
▲ 토루 안 화가. 그림들을 보며, '날씨가 좋았을 때 왔으면 좋았겠다' 라는 생각이... (ㅠㅠ)
회원루(怀远楼)
마지막으로 다른 토루보다 비교적 젊은 회원루를 돌아보기로 했다. 회원루에는 가운데 사시실(斯是室)이라는 조당(祖堂)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 가족들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객가인들은 원래부터 교육열이 대단했다.
p. 185 ~ 188 객가 문화의 주요 특징으로 다음 네 가지는 꼽을 수 있다.
1. 교육을 중시하여 문풍이 흥성했다.
2. 객가인은 종족 관념과 고향 관념이 비교적 강하다.
3. 객가인은 근면하고 어려움을 잘 견디며 스스로 노력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4. 객가인은 독특한 풍습을 많이 갖고 있는데, 이는 객가인의 대규모 이동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예컨대 장례를 두 번 치르는 풍속은 광동성에서는 비교적 보편적인 일이지만, 객가 지역에서 특히 성행한다.
- <중국의 문화지리를 읽는다> (후자오량 저 | 김태성 역) 中
주소: Nanjing, Zhangzhou, Fujian, China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 곽말약, 지도자 손문, 싱가포르 전 수상인 리콴유, 중국 정치가 덩샤오핑 등이 객가 출신인데, 모두 객가인들의 뛰어난 교육열 때문에 태어난 인재들이었다.
한 채 한 채 깊은 역사와 재미난 이야기를 담은 토루를 둘러보면서, 중국역사의 깊이를 다시 한 번 느껴 볼 수 있었다.
조금 날씨가 맑았더라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