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전형적인 '한신칸 소년'이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당시의 한신칸은ㅡ물론 지금도 그럴지도 모르지만ㅡ소년기에서 청년기를 보내기에는 썩 좋은 장소였다. 조용하고 한가하며 어딘지 모르게 자유로운 분위기가 배어나고 있었다.
- p.203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著) 中
1995년 진도 7.2로 도심을 강타한 한신·아와지 지진은 하루키로부터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고향을 빼앗아간 사건이기도 했다.
▲ 산노미야역 부근, 철로? 밑에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하루키는 지진 후 2년 뒤 상처입은 고향을 걷는 여행을 떠났다. 고시엔 구장이 가까운 니시노미야에서 항구가 있는 고베까지 약 15km의 여정. 여행기는 '하루키의 여행법' 가장 마지막 장에 실렸다.
책에 나온 하루키가 스쳐간 장소들 몇 곳을 실제로 찾아가보며, 나 역시도 그곳을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 슈쿠가와역 앞에 있던 양갱집
오사카에 도착해선 숙소 주변 라멘집에 들어가 배를 채우고 고베로 향했다. 거의 오후 4시가 다 되어 출발.
강 위에 서서히 내려 앉던 석양과 함께 고베로 저물어 갔다.
(확실히 동쪽에서 서쪽으로 간 것이니...)
오렌지빛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잠깐 내려보고 싶어졌다.
마침 다음 역이 책에 나온 듯한 '슈쿠가와역'에 이어서 잠깐 내려 걸어 보기로 했다.
하루키는 교토에서 태어나자마자 슈쿠가와(夙川)로 이사를 간다.
니시노미야에서 슈쿠가와까지 걸었다... 내 기억 속에 있던 과거의 거리 광경이 상상 속에서만 남아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옛날에 살던 슈쿠가와 근처의 낡은 집도 없어졌다.
- p.207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著) 中
역에서 내리니, 토요일의 저녁 시간.
역 앞에서 모금활동을 하고 있는 학생들과,
빅이슈를 팔고 있는 아저씨,
나들이를 다녀온 듯 한 가족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기대하며 미용실 의자에 누워있는 아주머니의 발도 구경했다.
해가 저물어 가는 아쉬움과 주말의 행복함이 동시에 전해오던 그 시간에 강을 따라 걸었다.
그들에겐 일상일 뿐인 풍경이지만, 여행자인 내게는 너무나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였다.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동네네.'
슈쿠가와 강변은 하루키의 작품 '랑게르한스 섬의 오후'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교과서를 집에 두고 와 쉬는 시간에 집으로 뛰어간 중학생이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길. 4월의 햇살이 너무나도 따스하여 잔디밭에 눕는다. 머리에 벤 생물 교과서로부터도 풍겨오는 봄의 향기와 강물 소리를 즐긴다.
▲ ‘하루키의 여행법 사진편’에 실린 슈쿠가와 사진.
이 한적한 배경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한정 부러워졌다.
원래도 벚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으로, 많은 문인들의 사랑을 받은 장소라 한다.
지금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주문하는 피자마다 번호를 매겨주는 피자집 피노키오.
유명한 줄은 알았지만 줄 조차 서지 못한 채 쫓겨날 줄은 몰랐다.
그 숫자의 의미를 잠시 동안은 잘 납득할 수가 없었다. 958,816? 나는 이 숫자에서 도대체 어떤 메시지를 읽어야 할 것인가? 그러고 보니 여자친구와 몇 번인가 이 가게에 와서 마찬가지로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번호가 딸린 갓 구은 피자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 p. 221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著) 中
내부 풍경은 크리스마스 저녁의 풍경처럼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따뜻한 분위기에서 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어 있는 석은 예약석이라 내줄 수 없다 했다. 누구도 쉽게 자리를 뜨지 않을 것 분위기. 허망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두 잔째 맥주를 마시면서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문고본 페이지를 펼쳐 읽다 남은 부분을 읽었다... 얼마 후 레스토랑을 나와 미리 예고된 대로 나는 비에 젖었다.
- p.222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著) 中
고베를 가기 전에 '하루키의 여행법'을 읽고 갔기에,
사실 나도 하루키의 고베 여행에 동행한 책을 챙겨 떠났다.
헤밍웨이의 소설 '해는 다시 떠오른다'는 전쟁 후 성불구가 된 주인공 제이크와 그의 연인이었던 브렛, 마이크와 콘 등의 친구들을 둘러싼 사랑 이야기다.
그럴싸한 사건도 없이 주인공들은 매일 저녁 파리의 술집과 카페를 전전하며 술을 마시고, 이야기의 후반부에는 스페인에 투우 관람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물론 그곳에서도 매일 밤 와인을 마시며 헛헛한 나날을 보낸다.
헤밍웨이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세대(the lost generation)를 이야기하는 소설은 하루키가 소설에서 자주 담는 '상실'의 의미와도 연결된다.
최근에도 하루키는 '술을 부르는 소설'로 이 작품을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고베에서 나는 피자를 못 먹은 허무감에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 도시에서 품어져 나오는 빛이 아름다웠던 고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