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폴드방스
Saint Paul de Vence
샤갈이 사랑한 마을
생폴드방스 (Saint Paul de Vence)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 ~ 1985). 나에게 샤갈은 그렇게 친근한 화가는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작품이라곤 <나와 마을> 정도. 그것도 가끔 티셔츠나 가방 등에 프린트된 모습을 몇 번 보았을 뿐이다. 따라서 샤갈과 연이 깊인 생폴드방스(Saint-Paul de Vence)는 이번 남프랑스 여행에서 '시간이 나면 한 번 가보지' 정도의 도시였다.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는 버스 창밖에 펼쳐진 생폴드방스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니스에서 약 20km 정도 떨어진 생폴드방스는 아직까지 16세기의 건축물들이 남아있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중세도시다. 특별히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을 풍경만으로도 여느 도시보다 볼거리가 풍부하여 연중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니스에서 생폴드방스로 향하는 창밖 풍경은 겨울임에도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아 따스한 색감을 내고 있었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에 동글동글 열매가 맺어있는 모습을 구경하며,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저 멀리 산 위에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생폴드방스 마을 도입부에는 우리 동네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져 있어,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이 자그마한 중세시대 요새의 첫 풍경은 프랑스의 전통 놀이 페탕크를 즐기는 할아버지들의 여유로움으로 시작된다…
페탕크는 프로방스의 구슬놀이다. 구슬은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묵직한 쇠공인데, 코쇼네라는 조그만 나무 공을 먼저 던지고, 쇠공을 한 사람당 3개씩 던져서 코쇼네에 가장 가까이 굴리는 사람이 승리한다…
프로방스 어딜 가나 밤낮없이 페탕크를 즐기는 어르신들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도 페탕크 경기가 무르익을수록 공터는 더욱 더 여유로워진다.
- p.318 <프로방스에서 느릿느릿> 中
우리 동네와 비슷한 풍경이라는 것은 바로 공원 옆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동네할머니들의 게이트볼 풍경이다. 프로방스의 페탕크 할아버지들에게 우리동네의 게이트볼 할머니들을 소개해주고 싶다?는 매우 엉뚱한 생각을 하며 마을로 들어갔다.
미로처럼 구불구불난 길 양 옆에는 갤러리, 공방,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줄줄이 서있었고,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과 센스 있는 꽃장식이 눈길을 끌었다. 몇 군데 갤러리를 들어가서 구경하곤 했는데, 각 갤러리들마다 각자의 개성과 특색이 살아 있다. 길을 거니는 고양이들마저도 예술가적인 향기가 풍기는 듯. 진한 예술의 기운이 숨쉬는 마을이었다.
생폴드방스는 샤갈이 사랑한 마을로, 그는 인생의 말년을 이곳에서 지냈고, 이곳 공동묘지에 잠들었다. 마을 곳곳에서 샤갈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었다.
▲ 생폴드방스 마을과 샤갈의 모습.
샤갈은 유대인으로 1887년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97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일평생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때론 할 수 밖에 없었던) 삶을 살았다. 1910년 파리로 가서 미술활동을 하다가 1914년 고향으로 돌아가 순수미술 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요직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에 회의감을 느끼고 모스크바, 베를린을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 곳곳을 여행하고, 팔레스타인을 여행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는 유대인이었기에 미국으로 망명해서 생활해야 했다. 그리고 말년 20년을 보낸, '제2의 고향'이라 여긴 곳이 바로 생폴드방스.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굉장히 국제적이고 다문화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적 은유를 시각적으로 옮긴 그림이다. 즉, 언어 개념을 회화 이미지로 충실히 표현한 것이다. 샤갈의 작품에는 '시(詩)'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글로 씌여지거나 시각적 언어로 그러진 작품들이 그것을 검증하고 있다.
- p.40 <마르크 샤갈> 中
남프랑스 여행을 하다 보니 각 도시와 예술가들의 연관성을 살피며, 나의 머리 속에서는 나름의 연산작용이…
고흐의 도시 아를은 론강 위 하늘에 박힌 별 ‘별이 빛나는 밤’ 작품 때문인지, 한편의 로맨스소설과 같았고, 니체의 도시 에즈는 한 편의 철학서와 같았고, 세잔의 엑상프로방스는 그의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던 탓인지 한편의 수필과 같았다.
샤갈의 작품들은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내게는 매우 어려운)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탓인지, 그가 사랑한 생폴드방스는 그런 의미에서 내게 '시적'인 도시였다.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오는 그의 작품과 생폴드방스는 닮은 면이 많아서, 미로처럼 이어진 마을 구석구석에 다양한 이야기와 의미가 숨어있는 듯 했다.
또 길을 걷다보니 한 노부부가 가만히 앉아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여러 인생의 의미들을 생각하게 되다 보니 더더욱 도시가 한편의 시와 같이 느껴졌다.
마을을 걷다 보니 갈등이 나서 아이스크림집을 하나 들어갔는데, 믹스베리맛 아이스크림이 있다. 한 입 베어 문 순간, 새콤달콤 환상적! 아마 태어나서 먹은 아이스크림 중 가장 맛있었던 것 같다.
마을을 떠나기 전, 서서히 노을이 내려앉는 공동묘지를 바라보았다. 샤갈도 이곳에 묻혀있지만, 특별히 대단한 표식도 없다. 그냥 이 마을 풍경 안에 담긴 다양한 의미들을 조용히 품고 있는 듯했다.
'샤갈, 생폴드방스에 영원히 머물다'
Information
니스에서 생폴드방스까지는 버스 400번을 타면 쉽게 갈 수 있다. 니스 해변 건너편에 있는 congres정류장에서 방스행 버스를 타고 약 1시간전 정도 소요된다. 하차하는 정류장은 st paul village.
▲ 버스시간표 출처: http://www.cg06.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