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상 프로방스
Aix-en-provence
세잔을 낳은 풍경, 엑상프로방스
풍경은 이미 한 폭의 예술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 완성작을 세잔이 화폭에 옮겨 담았을 뿐.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엑상프로방스 여행길에 오르며 에밀 졸라가 쓴 <나나>를 챙겼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화가 폴 세잔의 절친한 친구로 둘은 어린 시절을 엑상프로방스에서 보냈다. 성인이 되어서도 졸라가 세잔을 파리로 불러 미술을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또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파리 말씨에 근시안인데다 늘 어색한 태도로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졸라는 친구들의 조롱과 야유를 받곤 했는데, 그때마다 세잔이 그를 보호해주고 너그럽게 감싸주었다. 이런 친절에 감사하는 뜻에서 어느 날 졸라가 사과 한 바구니를 들고 세잔의 집을 찾아갔다. 그들의 우정은 이 사과 바구니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 p.74 <여름의 묘약> (김화영 산문집 | 문학동네)
마르세유에서 북쪽으로 약 28km 떨어진 도시인 엑상 프로방스. 줄여서 ‘엑스’라고 부른다. 두 명의 위대한 예술가를 낳은 엑스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하였다. ‘에밀 졸라의 작품을 읽으면서 미리 엑스를 그려보자!’며 <나나>를 펼친 순간.
이런… 소설 <나나>의 배경은 파리다…^^;
나의 무지몽매함을 탓하며 엑상프로방스역에서 내렸다.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맴도는 도시의 첫인상부터 매우 만족스럽다. 노란색 건물들이 점심 햇살을 받아 부드러운 색채를 내고 있으며 번화가 도입부에 있는 드골광장이 하늘의 빛깔(남프랑스의 해변도시들의 하늘색과는 또 다르게, 좀 더 파스텔톤의 하늘색이어서 노란색 건물과 참 잘 어울린다.)과 눈부신 조화를 이룬다. 한 눈에 미술가에게 사랑 받을 만한 곳임이 느껴진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시답게 인포메이션 센터가 잘 되어 있다. 여행경로에 관하여 친절한 설명을 듣고 도시여행을 시작한다.
엑스의 메인 스트리트, 미라보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주간에 열리는 시장, 마르셰 드 노엘 (Marches de Noel)이 열려 있다. 마르셰 드 노엘에는 상통인형(santon, 성경 속 인물이나 프로방스에 사는 삶의 모습들을 인형으로 만든 것)을 비롯하여 군침을 돌게 하는 와플, 크레페, 컵케익 등이 있다. 러시아인형, 비누, 장식품, 심지어 불상까지 팔고 있는데… 파는 사람은 많은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하다.
구시가지 안쪽 골목길로 진입하니, 프랑스의 느낌이 물씬 ~ (물론 프랑스 여행 2일차. 무엇이 프랑스의 느낌인지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골목골목 상점들이 저마다의 주제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세잔을 느껴보고자 오른 여행길이므로, 상점들의 아기자기한 유혹을 뿌리치고 세잔의 아뜰리에로 향했다. 언덕 위에 있어, 10-15분을 걸어 올라가는데... 문득 서울의 북악스카이웨이가 떠올랐다. 엉뚱한 비교를 하며 올랐다.
세잔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은행가였던 아버지는 세잔 역시 은행가가 되길 원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화가의 길을 택한 탓에 세잔 자신은 궁핍한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의 심기를 해칠까 부인과 아들을 숨기기도 했고, 아버지로부터 생활비가 끊길까 늘 전전긍긍했다. 엑스 북쪽언덕에 위치한 아뜰리에는 세잔이 아버지의 유산 물려받은 한참 뒤인, 1902년에 직접 설계하여 지은 건물이다.
▲ 세잔 아뜰리에 입구
꽤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도시를 조망하며 조용히 그림을 그리기에 좋은 장소였다. 세잔이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인생의 마지막 4년을 보낸 장소. 2층 커다란 방 한 쪽 벽면을 거의 전면 유리창으로 만들어 두었다. 덕분에 프로방스의 온화한 햇빛이 방안에 듬뿍 내려 앉았다. 큰 사다리를 비롯하여 세잔이 정물의 대상으로 삼았던 갖가지 소품들이 마치 그가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듯, 어질러져 있다. 내부는 촬영이 불가했다.
아뜰리에 앞에는 세잔이 직접 밟아 다졌을 작은 숲길이 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헝클어진 수풀 사이로 수줍게 얼굴을 내민 작은 열매들도 만날 수 있고, 숲 안에서 세잔이 투덜투덜 바지의 흙을 털면서 나올 것만 같아 두근거린다.
혹자는 언덕을 오르는 품, 비싼 입장료에 비해 볼 것이 없다고 하는 데, 나는 미술관에서 세잔의 작품 몇 장을 보는 것 보다, 이곳이 좋았다. 아뜰리에에 오르고 내리는 길도 ‘갑자기 문을 쾅 닫아 고요해진 방 안에 있는 듯’ 관광객들로 북적대던 구시가지에서 멀어져 한적함과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길이었다.
ⓒ public domain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 생 빅투아르 산 (Mont Sainte-Victoire). 세잔은 자신의 아뜰리에에서 볼 수 있었던 생 빅투아르 산을 여러 번 그렸다.
세잔은 이 아뜰리에에서 1906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데, 4년 전 이미 친구 에밀 졸라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후였다. 사실 1886년에 졸라가 세잔을 모델로 한 소설 <작품>을 출판하면서 둘은 의절했다. <작품>은 야망을 갖고 있던 화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내용의 소설로, 사회 문제에 참여하지 않는 세잔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졸라가 우회적으로 세잔을 비난한 작품이었다.
세잔의 자존심은 상당히 상처받았음에 틀림없다. 소설 한 권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으로 졸라에게 쓴 그의 편지는 매우 형식적이고 거리가 있으며 예의 바르다.
“친애하는 에밀에게, <작품>을 막 받았네. 친히 한 권을 보내주다니 정말 친절 하군… 과거 속에 살 고 있는 당신의 폴 세잔.”
이것이 세잔과 졸라가 오랫동안 주고받은 서신 가운데 마지막 편지다.
- p.62 <폴 세잔> (울리케 베크스 말로르니 지음, 박미연 옮김 | 마로니에북스)
세잔의 자화상에서 풍겨오는 인상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그는 다소 내성적이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아뜰리에에서 어린 시절 함께 꿈을 꾸어온 절친했던 친구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겪었을 극심한 고독과 쓸쓸함을 상상해보았다. 떠나야 하는 여행자의 마음이 더욱 공허해진다.
ⓒ public domain (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 베레를 쓴 자화상 (Selbstporträt mit Barett)
[여행정보]
폴세잔 아뜰리에(Atelier Cézanne)
주소: 9 Avenue Paul Cézanne, 13100 Aix-en-Provence
가격: 성인 5.5유로, 학생 2유로
개관시간: 10월 ~3월 10:00 ~ 12:00, 14:00 ~ 17:00
4월 ~ 6월, 9월 10:00 ~ 12:00, 14:00 ~ 18:00
7월 ~ 8월 10:00 ~ 18:00
(1월 1일 ~ 3일, 5월 1일, 12월 25일, 1월~2월 일요일 휴무)
홈페이지: http://www.atelier-cezanne.com
▲ 세잔 아뜰리에로 오르는 언덕길에 위치한 집. 나무를 깍은 모양이 하드같다.
아뜰리에에서 언덕길을 슬슬 내려오면서 엑스의 성당, 생 소뵈르대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안이 또 대단하다. 5세기부터 17세기까지 고딕, 신고딕, 르네상스 등 다양한 건축양식이 모여 있다고 하는데, 정말 들어가는 방마다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냈다.
[여행정보]
생 소뵈르 대성당 (Cathédrale Saint-Sauveur)
주소: 34 Place Martyrs de la Résistance, 13100 Aix-en-Provence
개관시간: 8:30 ~ 12:00, 14:00 ~ 18:00
홈페이지: http://www.cathedrale-aix.net
엑상프로방스를 떠나기가 아쉬워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고 있는데, 길가에 계속해서 눈에 익은 인물의 포스터가 눈에 밟힌다. 카뮈다! 그러고 보니, 알베르 카뮈 탄생 100주년이라는 기사를 얼핏 한국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이외로 매우 가까운 곳에서 ‘카뮈: 세계시민’이라는 전시회를 접할 수 있었던 것.
▲ <카뮈: 세계시민> 전시장 입구
▲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 카뮈전 포스터.
카뮈 전시회는 엑스의 알뤼메르가에 있는 ‘책마을(Cité du Livre)’이라는 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카뮈의 사진(그는 언제 봐도 굉장한 미남이다), 친필 편지, 메모(그는 글씨도 잘 썼다.)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 <카뮈: 세계시민> 전시장 내부
Information
엑스 책마을(Cité du Livre)
주소: 10 Rue des Allumettes, 13100 Aix-en-Provence
홈페이지: http://www.citedulivre-aix.com
아무리 까뮈의 친필인들… 불어 까막눈인 나는 전혀 내용을 알 수 없어 속상할 따름. 하지만 <이방인> 밖에 읽어보진 않은 나지만, 카뮈를 작품이 아닌 사진과 편지 등으로 만나 본다는 것은 괜히 공적 관계였던 사람과 사적인 친분을 나눈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우연히 방문하게 된 책마을이 돌아와 책을 찾아보니 굉장히 가치 있는 곳임을 알게 되어 좋은 추억을 하나 더 새기게 되었다.
▲ 책마을 모뉴먼트. 카뮈의 <이방인> , 몰리에르의 <기분 환자>,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 책표지가 서 있다.
1989년 엑스 시 당국은 드디어 로통드 광장 뒤편의 옛 성냥공장을 터로 이 시립도서관을 이전하고 책과 관련된 기술대학, 다수의 협회, 모임 등을 대대적으로 통합, 확대하여 ‘책 마을’이라고 명명했다.
- p.66 <여름의 묘약> (김화영 산문집 | 문학동네)
엑상프로방스. 도시 풍경 자체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완성된 예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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