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sinki

닷새만이라도 여행자가 아닌, 생활인으로 지내고 싶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마음가짐 탓일까, 영화나 책을 많이 읽어보고 와서인가, 자주 오갈 수 있는 일본과 많이 닮았다 느꼈기 때문일까.

(특히 핀란드 사람들의 대화가 굉장히 친숙하다 느꼈는데, 돌아와서 찾아보니 핀란드어, 일본어, 한국어 모두 우랄알타이어족이란다. 뭐 대단한 발견까진 아닐 수 있지만.)

도시 첫인상이 낯설지 않았다. 자연스레 노면전차를 타고 내렸고, ' 많은 명소를 가봐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서점에서, 공원에서, 잔디에서, 오랜 시간 책을 읽고만 있어도 좋았다.

▲ 에스플라나디 공원. 이번 여행을 함께한 일본인 친구 말에 따르면, 핀란드는 추운 나라임에도 아이스크림 소비율이 전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한다.

헬싱키는 핀란드의 수도이자 항구도시다. 면적 715.49km²에 인구 약 60만명이 살고 있다. 서울면적 605.18㎢에 인구 1,000만이 넘게 살고 있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 수치는 헬싱키가 얼마나 숨쉬기 좋은 곳인지 짐작하게 한다.

물론 이미 잘 알려진 일본 힐링영화 ‘카모메식당’도 이번 헬싱키행을 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비행기티켓을 산 이유는 영화에서 미도리역을 맡은 가타기리 하이리의 글솜씨 때문이었다. 가타기리가 영화를 찍기 위해 헬싱키에서 한 달간 머물고 집필한 여행기, ‘나의 핀란드여행’을 읽고 나선 ‘꼭 가봐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헬싱키의 해 질 녘 태양의 각도는 호텔 뒤 정원의 나무를, 그 그림자가 비치는 하얀 벽을, 빨강과 녹색의 의자와 소파를 참으로 화사하게 보이게 했다. 내 방은 그리고 이 도시는 백야의 해 질 녘 불빛에 더욱 아름답게 녹아 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55 ‘나의 핀란드여행’ 中 (카타기리 하이리 作 | 은행나무)

비록 내겐 빨강, 녹색 의자가 없었지만, 내가 좋아라 하는 색만으로 빗어진 헬싱키 석양을 보고 있자니…

이 석양에, 이 도시에 마냥 녹아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연분홍, 아이보리, 희미한 하늘색.

밤 11시반 이면(이 되어서야) 이곳 석양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작은 여유를 가져다 준 듯 하다.

생활인이 되고 싶었던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항구 시장. 카모메식당의 영화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이 영화를 만들기 전 작가 무레 요코에게 의뢰하여 집필한 소설에는 주인공 사치에가 이 시장 주변을 떠도는 갈매기(일본어로 카모메)를 보고 식당이름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항구 시장에는 색색의 채소와 과일이 진열되어 있었다. 관광객도 많았다.

… 사치에는 푸훗 하고 웃고, 남쪽에 있는 실내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 p.37 ‘카모메식당’ (무레 요코 作 | 푸른숲)

항구시장에서는 채소나 과일들이 맛있어 보였고, 신선한 생선은 (사치에도 발길을 돌려 찾아간) 실내 시장 올드 마켓 홀(Wanha Kauppahalli)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특히 올드 마켓 안에 수프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지난 일주일간 식사로부터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해 갈증을 느껴온 내게 다른 어느 곳 보다 간절한 곳이었다.

 

인기가 많은 곳이라 15분 정도를 기다려서 맛 본 수프! 나는 해산물 수프를, 친구는 독특한 비주얼의 수프를 주문했는데, 둘 다 맛이 굉장히 좋았다. 해산물 수프에는 바다향이 가득한 신선한 해산물이 잔뜩 들어 있었다. 곡물이 다닥다닥 붙은 빵도 맛있어서 (빵은 제한 없이 먹을 수 있다.) ‘수프로 배가 차겠어?’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도록 배불리 먹었다.

INFORMATION

올드 마켓 홀(Wanha Kauppahalli)

연어, 새우 등 신선한 어패류와 채소를 판매하고 있으며, 커피나 차를 즐길 수 있는 카페와 식당도 많다. 수프집 이름은 스오파케티오(Soppakeittiö).

영업시간: 월~금 08:00 ~18:00, 토요일 08:00 ~ 16:00, 일요일 휴무

주소: Hämeentie 1a 00530 Helsinki

홈페이지: http://www.hakaniemenkauppahalli.fi/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아예 여행자이길 거부 할 순 없었다. 누구나 가보는 곳들은 당연히 들렀다. 마치 헬싱키 시민인양, 우펜스키사원 앞 잔디에 누워도 보고, 헬싱키대성당 앞계단에 앉아 있어도 보면서.

▲ 우스펜스키 사원

▲ 헬싱키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는 곳. 나도 그냥 그 누구나 중 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트램에서 내린 순간 펼쳐진 풍경은…

비행기구름이 성당의 뒤를 관통하고 있었고, 또 뭉게구름이 성당 아래에 내려앉아 있었다.

이 풍경을 눈에 담은 나는, 내 자신이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 된 듯 행복했다.

 

시간 많은 생활인인양 허세를 부리며 찾아간 곳 중 하나는 아테네움미술관(Ateneum Art Museum). 핀란드의 미술은커녕 핀란드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미술관으로 향한 이유는 거리를 걸을 때 마다 계속 눈에 들어온 토베 얀손(Tove Jansson) 100주년 기념 전 광고 때문이었다.

귀여운 무민이 있다!

이 기념전은 태어나서 본 미술전시 중 가장 재미있었다.

토베 얀손은 1914년 헬싱키에서 태어나, 25세에 무민 시리즈 첫번째 작품을 발표했다. 무민은 북유럽 전설의 괴물 ‘트롤’이라고 하는데, 괴물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무민 캐릭터에 핀란드의 아름다운 자연, 재치 있는 에피소드가 더해져 전세계적으로 사랑 받았다.

 

▲ 토베 얀손 Tove Jansson, 1956 (ⓒ public domain)

기념전을 통해 토베 얀손이 무민 뿐 아니라 다른 동화도 많이 그리고 집필했으며, 유화, 수채화, 풍경화, 초상화 등 다양한 분야의 미술작품을 완성시켰을 뿐 아니라 각종 매체에 카툰을 기고 하는 등 굉장히 다작을 한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최근 손그림에 흥미가 생긴 나는 작품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연필드로잉을 꼼꼼히 살폈다.

정말 토베 얀손의 ‘모든 것을 다 전시해 보이겠다’는 기세로, 그가 한 작은 낙서들까지도 모두 전시되어 있었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살펴보다 보니, ‘작가’ 토베 얀손이 아닌 토베 얀손이라는 '사람'과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어 행복했다.

영화 ‘카모메식당’의 촬영지도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처럼) 저녁산책을 하면서 외관만 스쳐지나가 보기로 했다. 카모메식당은 헬싱키에서 일본인 여성 사치에가 오니기리를 대표 메뉴로 하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각자 사연이 있는 손님들이 식당으로 모이며 생기는 소소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영화다.

영화촬영지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는 동네의 작은 식당처럼 소박한 곳이었다. 지금은 원래 식당이름인 ‘수오미’로 간판을 다시 걸고 핀란드 요리를 내놓는다고 한다. 워낙 일본인손님들이 북적거린다는 소문을 들어서, 식사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카타기리 하이리가 묘사한 그곳 주인들의 얼굴은 한번 보고 싶었는데, 토요일은 휴무라 아쉬웠다.

요리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할 때 그 행복하게 웃는 얼굴은 절대 잊을 수 없다. 마치 밥을 갓 지은 밥솥을 열었을 때처럼, 행복한 김이 화악 올라온 뒤 나타나는 웃는 얼굴은 반짝반짝 하얗게 빛났다. 갓 지은 밥처럼 웃는 사람들이 만든 요리가 맛없을 리 없다.

- p.50  ‘나의 핀란드여행’ 중에서(카타기리 하이리 作 | 은행나무)

영화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장면, 주인공들이 모두 선글라스를 쓰고 카페에 나란히 앉아 광합성을 하는 신이 있다. 친구와 나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이 장면이 촬영된 카페 우르술라에서 화이트와인 한잔과 새우 오픈샌드위치로 마무리 하기로 했다.

연한핑크. 아이보리. 희미한블루…

 

우리는 카페 우스룰라에 앉아 은은한 색을 내뿜으며 가라앉고 있는 석양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여행이 끝나고 진짜 ‘생활전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정말 슬펐다.

 

INFORMATION

카페 우르술라 (Cafe Ursula)

커피, 맥주, 와인 등의 음료 뿐 아니라 오픈샌드위치, 시나몬롤 등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다.

영업시간: 매일 오전 9:00 ~ 오후 10:00

주소: Ehrenströmsvägen 3 00140 Helsingfors

홈페이지: http://www.ursula.f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