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영주

오르고 오르고 올라, 무량수전에 닿다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p. 271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최순우 作 | 학고재) 

배흘림기둥은 왜 아름다운 것일까. 

건축학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을까.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단풍이 예쁘게 든 주말, 

부석사에 도착했다. 

 

부석사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상세보기

지도보기

 

궁금증을 바로 해소하기엔 뜸을 들여야 했다.

무량수전은 경사진 길을 꽤 올라야 한다. 

"사찰이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별로야. 

좀 멀어야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라며

투덜거리는 아들을 다독이던 아저씨의 말에 나도 힘을 얻으며 오르고 또 올랐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최순우 작가의 우리 문화유적 답사기다.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을 한국의 문화재와 전통미술과 함께 살았다. 국립박물관 학예관,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 등을 역임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의 관장을 지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속 글 한 편 한 편을 읽어내려 갈 수록 나의 어항 속 단어물고기들이 바다를 처음 만나게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내가 읽고 이해하고 쓰고 말하는 단어가 얼마나 빈약한지 처절히 느끼게 된 것이다. 

동시에 충격적이기도 했다.

어떤 표현들은 문맥 속에서 뉘앙스로 의미를 파악할 뿐 정확한 뜻을 알지 못했다. 

점점 사라지고 있는 우리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맥이 닿아 있을 지 모르겠다. 나 역시도 늘 모바일로 읽고 쓰고 하다 보니 쉽고 단순한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지 않으면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 세상에서 아름다운 말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맥락 속에서 부석사의 존재는 더욱 소중하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세운 절이다. 

677년이라고 하니, 무려 1300 여년이 넘은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건축물 중 하나.

부석사 삼층석탑과 당간지주

하지만 때는 잘 익은 가을날 

날이 날이었던 만큼 대단한 인파였다. 

고즈넉한 사찰을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웠다. 

떨어지는 해를 담으려는 삼각대들이 통통한 배흘림기둥 사이사이에 서 있었다. 눈 안에 잡힌 앵글 속 풍경이 조화롭지 못해 어깨가 축 쳐졌다. 

구석에 쳐박혀 기둥을 열심히 보기로 한다. 

인심 좋은 아저씨 배 같아 보이기도 하고, 

꼬마아이가 배불리 먹은 후 볼록 나온 배 같기도 하고, 

중국의 불상을 닮은 듯도 하고... 

책에는 '임산부의 배'란 표현이 담겨있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누가보아도 노골적으로 배가 불룩한 기둥이다. 기둥이 애를 낳으려는 지 만삭이 다 된 모습이다.

- p.146 '배흘림 기둥의 고백' (서현 作 | 효형출판) 

이 책은 나의 처음 궁금증인 '배흘림 기둥의 건축학적 가치'에 대해 최순우 작가의 책에선 답을 얻을 수 없어 구입한 책이다. 

우린 교과서에서 배흘림기둥의 존재이유를 일자 기둥의 중간이 가늘어 보이기 때문에, 착시 현상을 보정하기 위해 이와 같은 기둥을 만들게 되었다 배운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 배웠던가?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작가는 주춧돌(기둥을 받치고 있는 돌)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기둥 하부가 작을 수록 주초를 다듬기 수월했다는 것.

배흘림에 관해 주초와 연관된 설명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확인할 길은 없다

... 그러나 배흘림기둥이 지닌 현실적 장점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배흘림기둥의 목적은 미감의 만족이 아니고 제약의 극복이었을 것이다.

- p.149 '배흘림 기둥의 고백' (서현 作 | 효형출판) 

배흘림기둥의 건축학적 가치가 어떻든 

해가 지는 가을날의 부석사는 아름다웠고 

노을빛을 안은 배흘림기둥은 더욱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