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와 깊이감 (depth)

投稿日: Oct 04, 2013 9:29:21 AM

** 이 글은 하루키의 소설과 수필 몇 권을 읽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뽑아 구성한 것입니다.

(저는 비교적 최근에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에 빠져든 평범한 독자입니다. 최근에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읽진 못했습니다. 또 평범한 독자이기 때문에 문학적으로 작품을 평가할만한 역량은 되지 않습니다. 또 빠져들었기 때문에 다분히 하루키와 그의 작품에 우호적입니다.

스포일러가 싫으신 독자 분들은 해당 글을 읽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몇 개 문장을 발췌했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데 방해가 되실 수 있습니다. 또 기억력이 많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혹여나 제가 잘 못 기억하고 있거나, 제멋대로 해석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 몇 권에, 끝없이 아래로 향하는 '깊이감'이 느껴지는 장소설정이 있다.

주인공들은 그 바닥이 쉽사리 보이지 않는 장소로 깊숙하게 내려간다.

그 깊이감은 의외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상(우물, 벽장, 비상계단 따위의)에 입혀진 상상력이다.

어린 시절 한 번쯤은 해보는 엉뚱한 생각들. 우물 안으로 들어간다든지, 벽장 안이 또다른 공간과 이어진다든지..

그 생각들이 유치하지 않고 세련되게 표현된 것이 하루키의 소설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p. 117 그것은 화성의 지표에 무수히 파여 있는 바닥 없는 우물 속으로 내려간 청년의 이야기다.

주인공이 글을 배운 가상의 작가 하트필드의 작품 속 내용으로 등장하는 기묘한 이야기다. 우물 속으로 내려가는 이야기는 나중에 작품 <태엽 감는 새>로 이어진다.

p.118 그는 우주의 광대함에 권태를 느끼고.. 우물 밑으로 내려갈수록 조금씩 기분이 좋아졌고, 기묘한 힘이 부드럽게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우물에 들어간 이야기는 <태엽감는 새>에서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태엽 감는 새>

(2권) p. 93 우물 앞으로 가 뚜껑 위의 누름돌을 치우고, 두 개로 나뉘어진 반달 모양의 판자 뚜껑을 하나를 벗겼다.

p.94 흐늘거리는 줄사다리를 타고 우물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힘든 작업이었다.

주인공 오카다는 아내가 떠나자 집 주변 폐가에 있는 우물로 들어가 생각을 정리하다 나온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이야기이지만,하루키는 (마치 본인이 직접 우물에 들어가 본 마냥) 생생하게 우물 속 시간을 표현하고 있다. 

읽는 내내 마치 내가 우물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어 답답함을 느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p.42 빌딩에 있는 한 방의 옷장 안이 이렇게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고,그 밑으로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얘기 따윈…

주인공은 의뢰인을 만나기 위해 독특한 장소로 들어가게 되는데, 도쿄에 있는 한 사무실 벽장에 입구가 있고, 입구에는 사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깊은 곳에 강물이 흐르는 장소다.그 강물을 따라 폭포 속으로 들어간다.

하루키 소설의 매력은 ‘절대 있을 법 하지 않은 장소’를 ‘정말 있을 것 같은 장소’로 그려내는 점이다. 읽고 있으면 나 역시 서울의 한 사무실 벽장을 통해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1Q84>

p.30 아오마메는 무언의 관중에게 등을 돌리고, 발바닥의 철제의 까칠한 냉기를 느끼며 비상계단을 신중한 걸음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가던 소설의 여자주인공 아오마메는 길이 너무 막히자 도로변의 비상계단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다른 세계에 진입한다. 

그 세계는 1Q84년으로, 달이 두 개나 떠 있는 세계.

초입에 등장하는 이 깊이감은 소설 전반 스토리에 핵심적으로 기능하는 공간으로 향하는 문이다.